[최보식이 만난 사람] "부친이 拉北된 지 50년 됐습니다… 죽기 전 해결이 어렵겠습니다" 스크랩 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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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

"대통령께서 납북자 가족에게도 '세월호' 1만분의 1이라도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따뜻하게 손잡아주시길…"

"엄마가 '생선 장사 할 때까지 돈을 대줄 테니 한 명이라도
더 구해오라' 고 말했다… 포로 12명, 납북자 8명 구출"

얼마 전 이런 문자메시지가 왔다. 발신인은 최성룡(65)씨였다.

"지금은 전후(戰後)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어려운 호소 드리려고 한번 뵙고 싶습니다. 제 부친이 납북된 지 50년 지났습니다. 제가 죽기 전까지 해결이 어렵겠습니다. 많이 도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사실 그를 도와준 게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만났다.



최성룡씨는“2004년 북한에서 처음으로 국군 포로 유해(遺骸)를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최성룡씨는“2004년 북한에서 처음으로 국군 포로 유해(遺骸)를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제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다 챙기겠다고 하셨고,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들이 가족 품으로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원합니다'라는 댓글도 썼습니다. 대통령께서 우리 납북자 가족들에게 세월호의 1만분의 1이라도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납북자 가족들과 따뜻한 밥 한 그릇 함께해달라는 겁니다.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답이 없었습니다."

―대통령 일정이 빡빡한데 면담 요청을 다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자국민이 납치된 문제인데도 쉬쉬합니다. 정권만 잡으면 북한과 대화한다고 눈치를 봅니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역대 정부가 다 그랬어요. 우리 정부가 방치하니 납치한 북한이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우리 같은 납북자 가족은 미운 오리 새끼나 다름없지요."

그는 충남 서천에 살았다. 열다섯 살 때인 1967년 연평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풍복호'가 납북됐다. 선장인 그의 부친을 포함해 8명이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월북(越北)'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빨갱이'로 찍힐까 봐 친척들까지 우리를 멀리했어요. 그 시절 저는 많이 방황했습니다. 제 형(兄)은 산업은행에 취직했다가 신원 조회에 걸려 일주일 만에 나왔어요. 나중에 북한은 납북 어부 중 다섯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버지 생사는 들었습니까?

"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켈로부대(미국 극동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비정규전 부대) 소속의 '북진호' 함장이었습니다. 서해 도서 지역을 오가며 유격전을 벌였지요. 납북 뒤 이런 이력이 드러나 1970년 인민재판을 받고 처형된 걸로 들었습니다."

―사망이 확인된 겁니까?

"돌아가셨겠지요. 하지만 북한 정부가 한 번도 공식으로 확인해준 적은 없습니다. 2년 전 유엔 기구에 '납북 사건' 진정서를 제출했고, 이를 통해 북한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공식 답변은 '북한 정부에 적대적인 조직에 의해 날조된 계략'이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뒤로 집안은 기울어졌다. 갖고 있던 어선 3척은 모두 처분됐다. 그 뒤로 어머니가 생선 장사에 나섰다고 한다.

"엄마가 굴비를 기똥차게 말립니다. 영광 굴비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였지요. 일본에 굴비를 수출해 돈을 꽤 벌었습니다. 저도 군대를 제대한 뒤 충남 서천 수협에 들어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집안이 안정됐는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이인모 노인 송환'(비전향 장기수였던 이인모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보냄) 뉴스가 나왔어요. 이인모 송환만 없었으면 제 인생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인모 송환'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었습니까?

"엄마가 이런 뉴스를 보고는 '김일성이 성공했구나. 우리는 납북자와 국군 포로를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한 명도 못 하고,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 같다. 하지만 유골이라도 찾아와라' 했어요. 그러면서 제게 큰돈을 줬어요. 당시 제 아내도 충남 장항에서 횟집을 해 '쩐(錢)'이 좀 있었어요. 엄마의 명에 따라 아버지 유골을 들고 올 목적으로 1994년 중국 단둥(丹東)으로 갔어요."

―사전에 어떤 정보를 갖고 떠났습니까?

"돈만 들고 간 거죠. 몇 달간 단둥에 머물면서 중국 공안을 구워삶아 북한의 '반탐(反探·대간첩 업무) 조직' 사람을 소개받았지요. 북한에서 '반탐 조직'이 셉디다. 돈을 주는 것도 주는 것이지만, 그쪽에서 먼저 '삼성 휴대폰을 사달라'고 요구를 해와요. 휴대폰 신형이 어떤 건지 나보다 더 잘 알더라고요. 그걸 구해 보내주면 뿅 가는 겁니다. 대신 저는 정보를 건네받고요."

―어머니의 당부대로 아버지 유골을 갖고 나왔습니까?

"아버지 것이라며 뼛조각을 들고 와 속기도 했고, 아버지의 켈로부대 군번줄이라고 해서 돈을 많이 주고 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짜였어요. 사기를 많이 당했어요. 하지만 납북자와 국군 포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은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정보입니까?

"1971년과 1972년 서해에서 조업 중이던 휘영37호와 오대양61·62호가 납치됐어요. 선원 중에는 경남 거제시 장목면 농소마을 사람만 18명이었습니다. 한마을에 살던 남자들이 거의 다 납북된 겁니다. 그 납북 어부들이 1974년 북한 묘향산에서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이 입수된 겁니다. 2005년 조선일보에서 특종으로 터뜨렸지요. 33년 만에 처음으로 납북 어부들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지요. 1995년 원산에서 교육받던 다른 납북자들의 단체 기념사진도 입수했어요. 이 또한 조선일보에 보도됐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이 사진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했는데 모두 진본(眞本)으로 판정받았어요."

―어떻게 그런 내밀한 사진까지 바깥으로 흘러나올 수 있습니까?

"글쎄 말입니다. 돈을 주니까 되더라고요. 제가 이 바닥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몇 가지 했는데, 북한에서 국군 포로 유해(遺骸)를 들고 나온 것도 처음입니다."

―생존 국군 포로가 아니라 그 유해를 처음 들고 나왔다는 말입니까?

"예. 2004년 겨울 북한에 살던 국군 포로 유족이 '아버님 유해를 갖고 나오면 한국까지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제 정보원을 통해 문의해왔습니다. 그 국군 포로는 고(故) 백종규 하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족에게 '내 고향 경북 청도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는 겁니다. 저는 '무조건 들고 나오라'고 했지요. 그분 따님이 가방에 유골을 모두 담아 중국 옌지(延吉)로 탈북했습니다."

―유골을 담은 가방을 갖고 서울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까?

"탈 수가 없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이런 경우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어요. 중국 공안이나 북한 정보원에게 그 따님이 잡힐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유골은 중국 땅속에 일단 파묻어 놓고, 저 혼자 먼저 들어왔습니다."

1974년 묘향산에서 찍은 납북 어부 단체 기념사진.
1974년 묘향산에서 찍은 납북 어부 단체 기념사진.
―어떤 방도를 취했습니까?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지만 들리는 반응이 시원찮았어요. 그래서 방송 기자와 함께 중국으로 되돌아가 MBC 9시 뉴스에 터뜨렸어요. 바로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 지시가 떨어져 처음으로 항공편에 유해를 싣고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를 조용히 들여오려는 국방부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제가 '정식 예우를 갖추라'고 또 난리를 쳤어요."

―어떤 정식 예우를 말합니까?

"국군 포로 유해 송환 아닙니까. 관(棺)을 태극기로 감싸고 공항에서는 군악대 연주를 하게 했어요. 그리고 장례식 전에 유전자 감식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방부에서는 '비용 많이 드는데 왜 그런 조사를 하느냐'고 했지만, 정식 공증을 받고 싶었어요. 그때는 이런 매뉴얼이 전혀 없었어요. 그 뒤로 이 소문이 북한에 전해져 국군 포로 유족들이 유해를 들고 탈출했어요. 지금까지 7구가 나왔습니다."

―생존 국군 포로나 납북자를 탈출시키지는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국군 포로 83명이 탈출했어요. 그중 12명의 탈출에 제가 관여했습니다. 이제 국군 포로 평균 연령은 90대여서 거의 다 돌아가셨다고 봐요. 전후(戰後) 납북자는 9명이 구출됐어요. 이 중 8명을 제가 모시고 왔어요. 제가 모시고 나온 분 중에는 당초 정부의 전후 납북자 명단에도 없는 분이 있었어요. 국정원에서 뒤늦게 명단을 수정했습니다. 납북자는 모두 516명입니다. 북한에 3년 이상 억류된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초 아버지의 유해를 갖고 나오려고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국군 포로와 납북자 구출로 확대됐습니까?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가 천하의 여장부(女丈夫)입니다. 아버지처럼 6·25 당시 유격 부대 소속이었고,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 자국이 있습니다. 엄마가 '생선 장사 할 때까지 돈을 대줄 테니 한 명이라도 더 구해오라'고 했어요.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을 구해오는 데서 위안받은 거죠."

―납북자나 국군 포로를 이렇게 많이 구출해왔으면 정부 표창이나 상금을 많이 받았겠습니다.

"정부는 왜 납북자를 구해오고 공개하느냐고 비판했어요. 북한과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시끄러워지는 게 싫은 겁니다. 보수, 진보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정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재작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납북자 문제를 다룬 인권 대회가 열렸을 때 우리는 달랑 납북자 가족 다섯 명만 갔습니다. 일본은 납북자 가족과 함께 담당 차관(次官)이 동행했어요."

―일본 정부는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을 주요 외교 현안으로 삼고 있지요.

"2002년 평양에 간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과 회담할 때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결국 김정일이 일본에는 납북 문제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납북 일본인 다섯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지금의 아베 총리가 당시 실무 협상을 했습니다.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납북 일본인들 가족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자국민 문제에 어떻게 나서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북한 정권과 접촉해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군요.
 
"저도 북한 정권에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1978년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 학생의 어머니는 역대 대통령에게 '우리 민교가 북한에서 잘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북한의 납치 행위를 용서할 테니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써왔습니다. 대통령은 이런 가족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북한의 행태는 그렇다 해도. 우리 정부가 자국민(自國民)인 납북자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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